#05_[번역] 공유경제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모습일까?

공유경제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모습일까? by 아르튀르 드 그라베
원본 Original Link_The Sharing Economy: Capitalism’s Last Stand? [LINK] by Arthur De Grave

본 글은 기고자 ‘아르튀르 드 그라베’의 동의하에 비상업적 용도로 번역 및 공유되며, 의역한 내용들이나 오역된 부분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원문도 함께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Image: School of Hieronymus Bosch. Public domain.
개인이 독점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과도한 소비주의에 빠져있던 과거 수십년을 돌이켜 보면, 이런 변화는 혁신적인것처럼 보인다. 공유 경제(Sharing Economy)는 메인 스트림을 장식하는 표현이 되었고, 그에 대한 문제들도 제기되고 있다. 앞으로 공유경제의 흐름은 어떻게 변할까? 새로운 동기부여 일까,아니면 새로운 착취의 방법일까? 혁신일까, 아니면 그저 비즈니스의 한 방법일 뿐일까?
문제에 대한 진단을 하기전에, 확실히 말해두고 싶은것이 있다. ‘협력 경제'(collaborative economy [LINK])와 ‘협력적 소비’라고 말 할 수 있는 ‘공유경제’는(Sharing Economy or Collaborative Consumption)는 엄연히 다르다. 공유 경제외 분산 생산(distributed production ; 지역화), P2P 금융(P2P Finance; 금융기관을 배제한 개인간의 거래, e.g.비트코인),오픈 소스와 오픈 지식 움직임(e.g.Moocs)등도 ‘협력 경제’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커뮤니티 내에서의 ‘수평적 관계’와 ‘분산된 권한’을 가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2차 산업 혁명이후의 계급화된 조직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협력 경제의 움직임이 일어나는데는 많은 원인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 모두 열거할 수는 없고,(링크된 에세이를 읽어보길 권장한다.[LINK]) 어쨌든 과거의 경제 논리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알수 있다. 우리에겐 새로운 경제 논리가 필요하며, ‘협력 경제’가 바로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협력 경제는 몇가지 모순점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공유경제 영역에서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이 글에서 알아보도록 하자. 아마도 공유경제는 불평등을 유발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 불평등 성장 시대 속의 동기부여  >
개인의 소유권을 초월하는 (Access over ownership)경제 시스템이 가능할까? 문자 그대로 그것은 ‘혁명’이다. 칼 마르크스가 지하에서 흥미로워 하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개념을 좀 더 가까이 접근해보면, 틀림없이 부와 재물을 축적하는 자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반면에 공유(Sharing)는 현재의 이기주의를 대표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부를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는 개인)와 정반대되는 ‘순수한 도덕성’을 의미하는 멋진 단어로 들린다. 그 동안 우리는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이다’ ( 토마스 홉스[LINK] )라는 논리의 시대를 살아왔고, 그런 관점에서 경제와 정치 시스템을 구축해온 우리들에게 ‘공유’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우리는 잘못된 삶을 살아왔으니, 순수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급성장하고 있는 기존 노동자들의 경제활동에 악영향을 주는 서비스(우버나 에어비엔비등 [LINK] )들도 공유경제를 지향하고 있을까? 이 논쟁은 두가지 큰 주제로 나뉘어 지는데, 하나는 ‘경영권의 구조에 대한 논쟁’ (공유경제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선 기존 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독점’과 같은 유사한 노선을 탈피해서 협력적인 구조로 바뀌어야 된다는 논조)이고 또 하나는 ‘고용관계에 대한 논쟁’( 현재 대표적으로 성장한 공유경제 서비스들은 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서비스이지, 사회적 빈곤자들을 위한 고용 문제 해결을 해줄 수 있는 대책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이 두가지 문제는 모두 공유경제가 탄생하게된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2008년 세계금융 위기에 대항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한 번더 변화할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경제를 가장 특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평등한 경제 성장( 이게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어보길 권장한다 [LINK] ), 그리고 직업에 따른 수입의 불평등과 자본 독점 후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이 바로 그것이다. 자본의 분배는 전체의 1퍼센트만이 부를 가지고 있는 세계1차대전 이전의 상황과 비슷한 상황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인류의 문명화를 붕괴[LINK] 시킬 수도 있다.
샌프란시스코 지역민들에게 자사 버스에 돌세례를 받았던 구글의 회장 ‘에릭 슈미트’도 불평등은 다가올 미래의 민주주의를 해치는 가장 큰 문제가 될 것 [LINK] 이라고 했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권력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다보스 포럼에서도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 [LINK] 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공유경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공유경제가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인지 ‘자본주의의 최후의 발악’인지 알기 위해서는 공유경제가 ‘불평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해 봐야 한다.
< 자산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가? >
협력의 관점(Collective Standpoint)에서, 자원을 개인화해서 소유하는 것 보다는 접근성을 열어 두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보여진다. 베이비 부머 세대와 젋은 세대를 비교해보면, 젊은 세대가 좀 더 소유욕이 적어 보인다. 물론 소유 할 수 있는 기회도 베이비 부머 세대해 비해서 적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자산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라고 말한다면, 자산이 내것이 아니게 되면, 누구 것이 되냐고 반문하게 될 것이다. 18세기 유럽 계몽시대의 사람들(Aufklärung thinkers)은, 개인의 재산 소유가 본질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경비원들까지 대동해서 지켜냈다. 중세시대로 돌아가보면, 농노들은 자신이 일하는 토지를 개인 소유화 할 수 없었고, 노예들은 빌리는 토지 조차 가질 수 없었다. 때때로 누군가는 ‘소유화’를 통해, 또 다른 누군가가 소유화 하지 못하도록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유경제를 향한 반발이 시작되는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과거의 방식으로 경영권을 생각하는 ‘벤쳐 투자자’들이 대부분의 공유경제 스타트 업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비즈니스 스쿨에서 공부할때, 이렇게 배웠다. “어떤 회사든 그들의 최고 목표는 주주들의 수익의 최대화이다. 직원들과 고객은 맨 마지막이다.그리고 일반적으로 투자회수율을 극대화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객으로 부터, 최대한 많이 거둬들이는 것과 직원들에게 가능한한 적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현재의 투자자들에게 있어서 ‘주주들’은 평등한 관계의 이웃(peers ; 라틴어의 par에서 유래, par는 equal, 즉 평등함을 이야기함)이 아니라, ‘군주’와도 같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비즈니스 모델이 지속가능한 커뮤니티의 가능성을 중심에 둔다면, 높은 회수율을 거둬들여야 하는 ‘투자자에 대한 의무’와 P2P를 기반으로 ‘최대한 평등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하는 의무’간에 충돌이 발생하는건 당연하다. 결국, 언젠가 둘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된다.
< 공유는 크라우드 소싱의 다음 모델일까? >
이점이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이다. 공유경제 서비스는 기존 직업군의 파괴를 야기시킬 수 있다. 에브게니 모로조프 [LINK]같은 사람들은 공유경제는 단지 디지털 경제와 크라우드 소싱의 다음 버젼일 뿐이라고 말한다. 공유경제가 가진 좋은 동기부여와 기업가 정신에 대한 멋진 연설들에도 불구하고, 공유 경제의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 고용ㆍ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ㆍ파견직ㆍ실업자ㆍ노숙자들을 총칭 [LINK] )라고 단정한다. 아직 그들 스스로 깨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도 그런 요소를 지니고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 시스템이 엉망이 되었을때를 기억하는가? 70년대 갑작스럽게 오일 쇼크가 일어났을때 말이다. 이게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image source : Economic Policy Institute
(생산직 근로자 및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시간당 생산성과 시급의 변화, 1948 – 2011)
인당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동안에, 실제 인금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지속시키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이 고안 되어야했다. 사람들은 더이상 자신들이 만든것도 구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표면적으로 대출은 무한대로 가능해졌다.이 새로운 정책은 바로 ‘빚’이라는 이름이다. 결국 ‘빚’속에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맞이하며, 무기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LINK]
그렇다면, 지금 부터 무엇을 해야할까? 만약 누군가 정확한 방법을 당신에게 알려준다면, 분명히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임금의 정체와 불평등이 치솟으며 신자유주의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기본적인 복지(임금 노동자들의 사회 안전과 건강보험등)의 구조에 대한 부분은 건들이지 않았다. 리프트나 우버의 운전자들, 에어비엔비의 집주인들은 ‘직원’이 아니므로 이런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런 점을 보면 현재의 공유경제라고 일컫는 서비스들은 크라우드소싱[LINK] 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회사에 귀속된 고용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유경제가 정말 크라우드 소싱일까? 모로조프는 공유경제가 유사 산업군에서 일하는 기존 노동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유경제가 기존 노동자들의 권리에 악영향을 미칠까?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곧 컴퓨터와 로봇이 어쨌든간에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게 될것이다. 임금 노동자들은 안전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투쟁하기 보다는 피케티가 말한 국제세(Global Tax)와 같은 방법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며, 당신은 아마도 공유경제가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 할 수 없고, 단지 매력적인 모습을 가장한 자본주의의 마지막 모습일 뿐이며, 불평등 문제를 악화 시킬 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 (헤겔 ) >
무엇인가 끝나기 전에 결과를 예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황혹녘에 (인간의 가장 친한 동물인)개와 늑대를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70년대부터 시작해서 2008년에 막을 내린 지난 경제 시스템을 생각해보면, 공유경제는 레이거노믹스[LINK]가 만들어낸 괴물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견들은 대체로 틀렸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지금 황혼녘에 있을 뿐이다. 오래된 방식의 사고법으로는 경제문제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다음에 어떤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실리콘 벨리의 벤쳐 투자가들이 그들의 영향력을 잃을 수 있는 평등화된 P2P 경제 패러다임에 발을 담그는건 어리석은 짓일까? 혹은, 21세기판 농노를 만들기 위한 동기부여를 위한 속임수일 뿐인걸까?
아무도 정답은 모른다. 고대의 회의론자들은 판단중지(epoché ;지적인 생각 없이 물리적 실제가 실질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의 방법을 이용해서 결론을 유보시켰다.
“만약 합리적인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은 그만두고 당신이 보고 싶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라.”
< 그렇다면,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
‘판단중지’로 이 긴 기고문을 끝낸다는 것은 뭔가 찜찜하다. 그래서 개인적인 두가지 의견을 남겨본다.
무엇보다 ‘공유경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면 자제해야한다. 그것은 뭔가 예상보다 높은 기대감을 가지게하는 속임수와 같다. 공유경제란 말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고객들로 하여금 너무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든다. 물론 ‘공유경제’는 진정한 의미의 ‘공유’라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혁명(Revolution)’을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혁명’은 세상을 나쁜 결과로 유도하려고 한다. 공유경제는 순수한 이타주의가 아니다. 과거 기독교인들은 핍박 받을때 사자굴에 들어가서 순교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고,이러한 행위는 수천번 반복 되었다. 인간은 ‘이타성’과 ‘이기성’을 모두 지니고 있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공유는 새로운 구매문화이고, 협력 경제에서 승리하는 법’ 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LINK]. 대기업들이 스타트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새로운 고객들을 차지 할 수 있을까? 만약 이러한 관점이 당신의 관심 분야라면, ‘커뮤니티나 수평성 기반의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멈춰야 할 것이다. 만약 고조화되는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협력 경제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당신의 기업의 시장 점유율을 보호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22세기를 위한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만들자는 이야기이다. 어쨌든 변화는 찾아 올것이고 오직 한가지 질문 만이 유효할 것이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변할 것인가?”
[기고자 ; 아르튀르 드 그라베]
‘아르튀르 드 그라베’는 OuiShare 컨넥터 중 한사람으로써, 파리에서 활동 중이다. Ouishare는 협력 경제를 알리고, 실천하기 위한 커뮤니티이다. 아르튀르는 ‘사회를 변화시키자, 경제를 변화시키자, 모든 것을 변화시키자’라고 말한다.
[우쿠빵의 생각 ; 공유경제는 하나의 경제적인 흐름일 뿐, ‘착함’이 비즈니스에 이용되면 안될 것]
최소한 근래 읽어본 공유경제 관련 국내외 기고문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깊이감을 보여주는 기고문이였습니다. 사회 철학적인 측면의 비판적 논조는 많았지만, 이렇게 명쾌하게 공유 경제에 대해서 집어주는 기고문은 본적이 없었습니다. 가장 강렬했던 기고문중에 한병철 교수님의 ‘친절마저 상품이 된 시대, 혁명은 없다’ 를 통해, ‘공유 경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그 다음은?’에 대한 질문은 다소 불투명 했고, 제레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조금은 긍정적인 방향에 대한 미래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현재의 ‘공유 경제’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는데는 조금은 아쉬운 감이 있었습니다.
이 기고문에서 특히 공감하는 부분은 ‘공유 경제’라는 말의 남용입니다. 새로운 경제적 접근 법으로서 좋은 의미를 갖지만, ‘착하다’라는 도덕적 관념을 사회적 기업이나, 공유 경제를 지향하는 기업들이 ‘슬로건’으로 이용하면서, 스스로도 혼란에 빠지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런 영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기업, 단체들이 ‘재능 기부의 탈을 쓴 재능갈취’일삼고 있으며,무급인턴이나 직원들에 대한 말도 안되는 보수로 노동자로써의 대우가 개차반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경제적 관점에서 도덕성을 절대 상품화 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엔 사회적 기업이나, 공유 경제 기업 외에도, 이미 우수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비즈니스를 해오던 기업들이나 사회에 기여하려는 곳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홍보나 마켓팅 용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CSR이나 CSV의 경우도 잠정적으론 기업의 홍보 수단일 뿐이며, 마이클 포터 교수가 말하는 규모의 CSV 관점에 100% 동의 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국내 굴지 기업들은 사회 공헌 활동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자랑하면서, 정작 직원들에 대한 대우는 개차반이거나 노조의 활동을 막는 모습들을 보면, 쉽게 그런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나,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칭찬해야할 건 칭찬해야지 않나’라며 은근슬쩍 넘어갑니다. 근래의 땅콩 회황 또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죠.
또 하나 예를 들자면, ‘구글식 사내 문화를 가진 기업’ 이라며, 사내 복지를 주구장창 강조하는 ‘꿈의 직장’들이 소개 되고 있고, 많은 친구들이 워너비 회사로 손에 꼽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엄청나게 그런 점들을 홍보합니다. 분명 다른 기업들에게도 ‘경쟁’요소가 되서 사회적인 변화를 유발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카더라’ 소문들은 실제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부당성도 상당하다라는 점입니다. 그런 사내 복지문화를 광고에 활용한다는 것은 이 사회나 기업문화가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음을 시인하는 꼴이기도 합니다. ‘친절마저 상품이 된 시대’란 이야기가 성립됩니다.
결국 기업의 윤리와 도덕성이란 ‘기업가 정신’이나 ‘공유 경제’, 혹은 ‘구글식 사내 문화’라는 표면적인 이야기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과거 국내 대기업들 조차 기업의 덕목 중 ‘사회와 공익에 기여한다’라는 문구를 내걸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기업 홍보’의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지, 정작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경우가 부지기수 입니다.
누가 더 공익에 기여하는 기업인가에 대한 평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기업’, ‘공유 경제 기업’ 이라는 타이틀과 CSR이나 CSV에 쏟아 붇는 비용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업가들, 특히 작은 스타트업을 시작하는 분들부터, 자본주의의 표면적 망상에서 벗어나서, 기업가로서의 ‘인간적인 도덕성’을 먼저 고려한다면, ‘착한 기업’이라는 딱지는 더 이상 자랑할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필자 아르튀르가 밝히다 시피, 공유 경제나 협력 경제는 당연히 벌어질 수 밖에 없는 패러다임 입니다. 특히 대중을 향한 서비스들은 보다 협력적이고, 소유권을 지양하는 방향으로 흘러 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업의 도덕적 우월함을 드러내는 용도로 이용되서는 않되며, ‘친절’과 ‘착함’을 표면적인 홍보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업가 정신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앞서, 인간에 대한 철학적, 도덕적, 윤리적 사유를 본능적으로 탑재했거나, 그러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기업가들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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